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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춘화 

정조를 생명처럼 여기던 조선시대…. 유교적 도덕 관념이 사회를 지배했던 18세기의 성(性)풍속을 담은 『한국의 춘화(春畵)』(에이앤에이 발행, 02-723-0291)가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성을 터부시하는 사회 통념 때문에 한국의 옛 춘화는 호사가의 안방이나, 미술관·박물관의 서가, 고미술품을 취급하는 화랑의 서랍 속에 숨겨져 있기 십상이었는데 지난 3월 29일부터 6월 7일까지 열렸던 제3회 광주비엔날레 특별기획 ‘인간과 성’전을 계기로 열린 마당으로 튀어나왔다. 중국·일본에 비하면 두 세기나 늦은 일이지만 성생활을 묘사한 화집이 출간, 장안의 화제가 되고 있다. 그것도 정조(正祖)의 총애를 한몸에 받았던 조선 제일의 풍속화가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 혜원(蕙園) 신윤복(申潤福)의 그림이 책으로 묶여 나온 것이다. 

『한국의 춘화』에 실린 그림은 단원의 『운우도첩(雲雨圖帖)』에 실린 15점(종이에 수묵 담채, 28×38.5cm)과 혜원의 『건곤일회도첩(乾坤一會圖帖)』에 담긴 15점(종이에 수묵 담채, 23.3×27.5cm) 중에서 10점씩을 고르고, 근대 인물화가 정재(鼎齋) 최우석(崔禹錫, 1899~1965)의 『운우도화첩(雲雨圖畵帖)』 24점(비단에 수묵 채색, 20.6×27.1cm) 중에서 10점을 뽑은 것이다. 

이번에 첫선을 보인 『한국의 춘화』는 유희만을 목적으로 하는 포르노물과는 거리가 멀다. 남녀의 노골적인 성애장면을 담고 있으면서도 그 배경을 이루는 바깥 풍경이나 실내 장식품을 적절하게 배치, 단순한 성 유희를 넘어선 한 차원 높은, 예술성을 지닌 성풍속도로 그려진 것이다. 이를테면 남녀가 바깥에서 은밀하게 정사를 벌이는 단원의 작품 ‘애무정사(愛撫情事)’를 보면 그림의 초점이 두 남녀에만 맞춰져 있지 않다. 물기가 흥건한 먹으로 묘사된 계곡 입구에는 진분홍 진달래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고, 바위와 흙더미(土坡)가 결합하는 장면은 자연에서의 음양(陰陽) 이치를 강조하고 있다. 우리 산하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여성의 그것을 닮은 여근곡(女根谷)을 은유적으로 표현, 자연과 인간의 음양 결합을 한 화면에 담아 남녀의 성애를 자연스럽게 부각시킨 것이다. 

담뱃대를 문 여인, 여인의 등에 얼굴을 묻고 있는 초립동의 살포시 보이는 볼기짝에서 외설은커녕 순수한 사랑의 몸짓을 느낄 수 있다. 또 하나 단원의 ‘월하연인(月下戀人)’을 보자. 달 밝은 밤에 두 남녀가 사랑을 나누고 있다. 돗자리를 깔고 방사(房事)가 아닌 야외 정사를 치르고 있지만 조금도 어색하지 않다. 이 그림은 춘화라기보다는 운치 있는 한 폭의 산수화 같다. 실제 손으로 벌거벗은 두 남녀를 가리고 보면 아름다운 밤 풍경일밖에 전혀 다른 생각이 들지 않는다. 이처럼 조선시대 춘화는 인간의 성을 자연과 결합시킴으로써 외설적인 주제를 예술로 승화시켰다. 상체나 둔부에 비해 다리가 유난히 가녀린 인체의 묘사는 비록 정확한 데생을 바탕으로 하진 않았지만 행위에 대한 사실감만은 잘 살렸다.

배경의 정물들도 이 그림의 주제인 운우지정(雲雨之情)을 나누는 남녀에게로 시선이 집중될 수 있도록 배려돼 있다. 전체적으로 담채와 수묵이 어우러져 담담한 느낌을 준다. 당장 한 편의 시가 읊어질 듯한 서정적인 자연경관을 성희 장면과 결합시킨 그림이다. 

조선시대 춘화는 성 유희 장면을 담고 묘사하면서도 그 장면에만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라 반드시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특징을 지닌다. 당대 사회에서 일어났을 법한 이야기들, 이를테면 한량과 기생의 관계 같은 것을 묘사한 일반 풍속화로 여겨지는 것이다. 초롱을 들고 기생집을 찾아온 한량이 방에 들어서자마자 옷을 훌훌 벗어던지고 장죽을 물고 누워 있는 기녀에게로 달려간다. 성급히 달려가는 한량의 몸짓도 우습지만 한량의 급한 마음을 알아차리고 반라로 누워 있는 기생의 표정 또한 재미있다. 속고쟁이가 없이 겉치마만 걷어 올려 당장이라도 일을 치를 수 있게 준비를 완료한 기녀의 속셈은 어떤 걸까…. 님 오시기만 기다리는 마음이 아니었을까? 그렇기에 한량이 들어서자마자 담배를 피우며 자세를 잡은 게 아닐까…. 아무렇게나 벗어 던진 갓과 옷, 그 옆에 놓여 있는 불밝힌 초롱으로 급한 정황을 읽을 수 있지만 왜 여인은 담뱃대를 물고 있을까. 여기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등불을 들고 오면서 기녀와의 이런저런 정사를 생각했을 한량의 다급함은 얼른 이해가 되지만 좀처럼 기녀의 담뱃대에 대한 수수께끼는 풀리지 않는다. 기녀도 담배를 피우면서 님 오시기를 학수고대했다는 해설이 가능할 것 같다. 하지만 그것만은 아니라는 설명이다. 님과 뜨거운 사랑을 오래오래 간직하기 위해 담배로 지연 작전을 구사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그래서인지 조선시대 춘화에는 곧잘 장죽을 문 여성이 등장한다.

스님과 여염집 여인의 정사 장면을 묘사한 그림에는 소설 같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 조선시대 여성에게 아들을 못 낳는 일은 칠거지악(七去之惡)이 아니었던가. 그래서 깊은 산중으로 부처를 찾아가 백일 치성을 드리고 수태, 대를 잇는 기쁨을 얻는다는 것이다. 결혼 10년이 넘도록 애를 갖지 못한 여성이 백일 치성으로 아이를 얻는 기적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여성이 백일 치성을 드리는 동안 이 여성의 행동을 지켜볼 수 있는 사람은 스님뿐이다. 불공을 드리면서 정담도 나눌 수 있다. 깊은 산속 절간에서의 이들의 만남은 큰 인연이다. 100일은 길다면 긴 시간이다. 머리가 잘 도는 스님이면 이 기간 중에 여성의 배란기쯤은 알아낼 수 있다는 얘기다. 입담 좋은 이야기꾼의 스님과 여인의 정사는 끝맺음을 이렇게 하고 있다. 배란기를 맞춘 마지막 치성. 탑돌이로 여성의 정신을 뺏는다. 두 손을 모으고 오직 아들 낳기만을 빌면서 수십, 수백 바퀴를 돌고 나면 핑하고 어지럼증이 온다. 기를 쓰고 몇 바퀴를 더 돌지만 탑이 있는 절 마당에 쓰러지기 마련이다. 여인이 쓰러지기가 무섭게 스님의 손에 의해 인기척이 없는 절 방으로 옮겨진다. 이윽고 애를 얻기 위한 숭고한 작업이 시작된다. 여인은 비몽사몽간에 무언가를 느끼고 있지만 노골적인 몸짓은 할 수 없다. 그저 눈을 지그시 감고 아무것도 모르는 체 스님에게 몸을 맡길 수밖에 없는 일…. 이 긴장감이 출렁이는 순간, 가만히 발을 밀치고 아무도 보아서는 안되는 장면을 동자승이 훔쳐본다. 이것이 ‘스님의 밀교(密交)’를 그려낸 소설 같은 이야기다. 하지만 이 춘화는 스님과 여인의 표정보다도 동자승의 훔쳐보기가 압권이다.

조선시대 춘화는 배경을 이루는 자연 경관뿐 아니라, 행위가 벌어지는 주변의 경물도 의미 없이 등장하는 법은 없다. 절구와 절굿공이가 있는가 하면, 참새나 개의 교미 장면을 살짝 곁들임으로써 강하게 암시하는 수법도 흔히 사용된다. ‘스님의 밀교’에서 동자승처럼 하녀나 시동이 남녀의 정사를 엿보는 장면을 심심찮게 등장시켜 그림 보는 재미를 돋워준다. 남녀가 성교하는 노골적인 표현이 있다 해도 주변 경관이나 화분·책상·장독대·화로·등잔·괴석 등 배경 그림들이 직설적인 표현을 누그러뜨리고 전반적인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만들어내기도 한다. 조선시대 춘화가 외설 차원으로 떨어지지 않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기도 하다. 

조선시대 춘화에서 얻을 수 있는 또 다른 재미는 다른 풍속화와 마찬가지로 은유적 표현과 해학·풍자가 깃들여 있다는 점이다. 노골적인 성희 장면을 주로 묘사한 정재의 경우도 댓돌 위에 남녀의 가죽신 두 켤레를 나란히 그려놓은 작품을 남겨 고도로 절제된 춘화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는 평을 받았다. 춘화는 아니지만 유천(柳泉) 김화경(金華慶)의 ‘해와 초가’처럼 이상야릇한 생각을 유발시키고 있다. 댓돌 위에 나란히 놓인 가죽신을 보고 부부의 방사를 떠올리거나, 방아를 찧다가 절굿공이를 놓아둔 채 초가집 방에 들어간 부부의 나막신 두 켤레를 보고 부부가 방에서 무엇하고 있을까 하고 공연한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나지막한 촛대에 촛불을 밝히고 두 여인이 춘화를 감상하고 있는 혜원의 그림은 무엇을 말하는 걸까? 약간 상기된 얼굴로 춘화를 바라보는 왼쪽 여인의 거친 숨결에 촛불이 휘날리고 있다. 일그러진 촛불의 묘사는 여인들의 흥분감을 묘사하기 위한 화가의 또 다른 배려일 것이다. 이처럼 직접화법으로서 춘화가 있는가 하면 간접화법으로서 춘화도 얼마든지 있다는 걸 우리 선조들은 대조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정재의 ‘목욕하는 여인’은 혜원의 ‘단오풍정’처럼 풍속화적 성격으로 그렸지만, 그림 그 자체만 보고 춘심(春心)을 느끼게 하는 작품이다. 프랑스 필립프 피퀴에 출판사가 발행한 『코리아 에로틱 페인팅』에는 바로 이 그림의 부분도(볼기짝이 살며시 보이는 여인의 뒷모습)를 표지 그림으로 삼았다. 

이당(以堂) 김은호(金殷鎬) 화백은 1911년, 서울 부자 이모씨의 청으로 춘화 몇 장을 그려주고 이 부자의 마음에 들어 생전 처음 기생집에도 가보고 폐백으로 쌀 10가마 값이 넘는 거액을 받아 가난을 면했다는 것이다. 운보(雲甫) 김기창(金基昶) 화백도 호사가들의 청에 못 이겨 춘화를 그렸고, 서양화가 박수근(朴壽根)·변종하(卞鍾夏)씨도 객기로 춘화를 그린 일이 있다. 간송미술관을 세운 전형필(全鎣弼)씨도 벽사(僻邪)라며 가방에 늘 춘화첩을 넣고 다녔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남녀간의 성애는 청동기시대 암각화, 신라시대 토우, 고려시대 동경(銅鏡)이나 청자 등에서도 볼 수 있다. 신라 토우에 해학적으로 등장하는 남녀의 결합이나 특별히 강조된 남녀의 상징은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는 뜻뿐만 아니라, 성 그 자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즐긴 우리 조상의 성 관념을 드러내는 증거가 아닐 수 없다. 우리나라 어디를 가나 흔히 볼 수 있는 남근석(男根石), 여근곡(女根谷)은 한국인의 자연스런 성 표현을 실감케 하는 민속 신앙이기도 하다. 조선시대에 춘화가 등장한 것은 유교 질서에 균열이 생기고 중인(中人) 계급이 성장해 소비가 늘고 유통 문화가 크게 발달한 때문으로 여겨진다. 조선시대 후기(18세기)에 춘화가 유행한 것은 명대(明代) 호색문화 유입과 관련이 있다. 아마도 명대 춘화가 조선 후기 춘화 유행에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보여진다. 

하지만 18세기의 진경산수(眞景山水)나 풍속화가 이룩한 독자성과 마찬가지로 춘화 역시 중국 것과 다른 조선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 조선의 춘화는 중국 춘화의 도상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조선의 성풍속을 짙게 반영하고 있어 회화적인 가치를 지닌 미술품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17세기를 전후해 판화로 제작되어 상품으로 팔리기 시작한 중국 춘화와, 같은 시대 판화의 일종인 우키요에(浮世繪)와 결합한 일본 춘화는 조선 춘화와 다르다. 일본 춘화는 채색과 인물 묘사, 과장된 성기, 화려한 의상과 기구 등을 통해 강렬한 인상을 주고, 중국 춘화는 아름답게 채색한 정원이나 궁중을 배경으로 다양한 체위 묘사에 초점을 맞춘 성적 유희물이라는 성격이 강하다. 중국·일본 것에 비해 한국의 춘화는 성을 자연현상과 음양사상으로 녹여낸 예술 작품이다. 우리의 성풍속은 문인화적 품격을 유지하면서 은유적이고 해학적으로 표현한 특성을 지니고 있다. 


 
김홍도(金弘道)

1745(영조 21)∼?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화가. 본관은 김해. 자는 사능(士能), 호는 단원(檀園)·단구(丹邱)·서호(西湖)·고면거사(高眠居士)·취화사(醉畵士)·첩취옹(輒醉翁). 

1. 가계·중요화력

만호를 지낸 진창(震昌)의 종손이자 석무(錫武)의 아들이다. 당대의 감식자이며 문인화가인 강세황(姜世晃)의 천거로 도화서화원(圖畵署畵員)이 된 그는 강세황의 지도 아래 화격(畵格)을 높이는 동시에, 29세인 1773년에는 영조의 어진(御眞)과 왕세자(뒤의 정조)의 초상을 그리고, 이듬해 감목관(監牧官)의 직책을 받아 사포서(司圃署)에서 근무하였다.
1781년(정조 5)에는 정조의 어진 익선관본(翼善冠本)을 그릴 때 한종유(韓宗裕)·신한평(申漢枰) 등과 함께 동참화사(同參畵師)로 활약하였으며, 찰방(察訪)을 제수받았다. 이무렵부터 명나라 문인화가 이유방(李流芳)의 호를 따라 ‘단원’이라 자호하였다.
1788년에는 김응환(金應煥)과 함께 왕명으로 금강산 등 영동일대를 기행하며 그곳의 명승지를 그려 바쳤다. 그리고 1791년 정조의 어진 원유관본(遠遊冠本)을 그릴 때도 참여하였으며, 그 공으로 충청도 연풍현감에 임명되어 1795년까지 봉직하였다.
현감 퇴임 후 만년에는 병고와 가난이 겹친 생활고에 시달리다가 여생을 마쳤다. 

2. 성품

조희룡(趙熙龍)의 《호산외기 壺山外記》와 홍백화(洪白華)의 발문(김응환이 김홍도에게 그려준 〈금강전도〉의 시화첩에 쓴 글)에 의하면, 그는 외모가 수려하고 풍채가 좋았으며, 또한 도량이 넓고 성격이 활달해서 마치 신선과 같았다 한다.
그는 산수·도석인물(道釋人物)·풍속·화조 등 여러 방면에 걸쳐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여, 당대부터 이름을 크게 떨쳤다.
정조는 “회사(繪事)에 속하는 일이면 모두 홍도에게 주장하게 했다.”고 할 만큼 그를 총애했으며, 강세황으로부터는 ‘근대명수(近代名手)’ 또는 ‘우리나라 금세(今世)의 신필(神筆)’이라는 찬사를 받기도 하였다.

3. 작품경향

그의 작품은 비교적 많이 남아 있는 편인데, 대체로 50세를 중심으로 전후 2기로 나누어지는 화풍상의 변화를 보인다.
산수화의 경우 50세 이전인 1778년작인 〈서원아집육곡병 西園雅集六曲屛〉(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이 말해주듯이, 주로 화보(畵譜)에 의존한 중국적인 정형산수(定型山水)에 세필로 다루어지는 북종원체화적 경향(北宗院體畵的傾向)을 나타내었다.
그리고 연풍현감에서 해임된 50세 이후로 한국적 정서가 어려 있는 실경을 소재로 하는 진경산수(眞景山水)를 즐겨 그리면서, ‘단원법’이라 불리는 보다 세련되고 개성이 강한 독창적 화풍을 이룩하였다.
물론 석법(石法)·수파묘(水波描) 등에서 정선(鄭#선19)·심사정(沈師正)·이인상(李麟祥)·김응환의 영향이 다소 감지되지만, 변형된 하엽준(荷葉#준14)이라든지 녹각 모습의 수지법(樹枝法), 탁월한 공간구성, 그리고 수묵의 능숙한 처리, 강한 묵선(墨線)의 강조와 부드럽고도 조용한 담채(淡彩)의 밝고 투명한 화면효과는 한국적 정취가 물씬 풍기는 김홍도 특유의 화풍이다.
또한, 만년에 이르러 명승의 실경에서 농촌이나 전원 등 생활주변의 풍경을 사생하는 데로 관심이 바뀌었으며, 이러한 사경산수 속에 풍속과 인물·영모 등을 가미하여 한국적 서정과 정취가 짙게 밴 일상사의 점경으로 승화시키기도 하였다. 그는 산수뿐만 아니라 도석인물화에서도 자신만의 특이한 경지를 개척하였다.
전기에는 도석인물 중 주로 신선도를 많이 다루었는데, 굵고 힘차면서도 거친 느낌을 주는 의문(衣紋), 바람에 나부끼는 옷자락, 그리고 티없이 천진한 얼굴 모습 등으로 특징지어지는 이 시기의 신선묘사법은 1776년에 그린 〈군선도병 群仙圖屛〉(호암미술관 소장, 국보 제139호)에서 그 전형을 찾아볼 수 있다.
후기가 되면 화폭의 규모도 작아지고, 단아하면서도 분방하며 생략된 필치로 바뀌게 된다.

4. 풍속화 작품

이러한 도석인물화와 더불어 그를 회화사적으로 보다 돋보이게 한 것은 그가 후기에 많이 그렸던 풍속화이다.
조선 후기 서민들의 생활상과 생업의 점경이 간략하면서도 짜임새 있는 원형구도 위에 풍부한 해학적 감정과 더불어 표현되고 있다. 그의 풍속화들은 정선이 이룩한 진경산수화의 전통과 더불어 조선 후기 화단의 새로운 경향을 가장 잘 대변해준다.
그가 이룩한 한국적 감각의 이러한 화풍과 경향들은 그의 아들인 양기(良驥)를 비롯하여 신윤복(申潤福)·김득신(金得臣)·김석신(金碩臣)·이명기(李命基)·이재관(李在寬)·이수민(李壽民)·유운홍(劉運弘)·엄치욱(嚴致郁)·이한철(李漢喆)·유숙(劉淑) 등 조선 후기와 말기의 여러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치는 등 한국화 발전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겼다.
앞서 설명한 작품 외에 그의 대표작으로는 〈단원풍속화첩〉(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보물 제527호)을 비롯해서 〈금강사군첩 金剛四君帖〉(개인 소장)·〈무이귀도도 武夷歸棹圖〉(간송미술관 소장)·〈선인기려도 仙人騎驢圖〉·〈단원도 檀園圖〉(개인 소장)와 〈섭우도 涉牛圖〉·〈기로세련계도 耆老世聯#계29圖〉·〈단원화첩〉(호암미술관 소장)·〈마상청앵도 馬上聽鶯圖〉 등이 있다.





신윤복(申潤福)


1758(영조 34)∼? 
조선 후기의 화가.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입부(笠父), 호는 혜원(蕙園). 화원(畵員)이었던 한평(漢枰)의 아들이다.
도화서(圖畵署)의 화원으로 벼슬은 첨절제사(僉節制使)를 지냈다는 사실 이외에 그의 생애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산수화에서 김홍도(金弘道)의 영향을 토대로 참신한 색채감각이 돋보이는 작품을 남기기도 하였지만, 한량과 기녀를 중심으로 한 남녀간의 낭만이나 애정을 다룬 풍속화에서 특히 이름을 날렸다.
그의 풍속화 등은 소재의 선정이나 포착, 구성방법, 인물들의 표현방법과 설채법(設彩法) 등에서 김홍도와 큰 차이를 보인다. 그는 남녀간의 정취와 낭만적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나타내기 위하여, 섬세하고 유려한 필선과 아름다운 채색을 즐겨 사용하여, 그의 풍속화들은 매우 세련된 감각과 분위기를 지니고 있다.
또한, 그의 풍속화들은 배경을 통해서 당시의 살림과 복식 등을 사실적으로 보여주는 등, 조선 후기의 생활상과 멋을 생생하게 전하여준다. 그의 대부분의 작품들에는 짤막한 찬문(贊文)과 함께 자신의 관지(款識)와 도인(圖印)이 곁들여 있지만, 한결같이 연기(年記)를 밝히고 있지 않아 그의 화풍의 변천과정을 파악하기는 어렵다.
김홍도와 더불어 조선 후기의 풍속화를 개척하였던 대표적 화가로서 후대의 화단에 많은 영향을 미쳐, 작가미상의 풍속화와 민화 등에는 그의 화풍을 따른 작품들이 많다.
대표작으로는 간송미술관에 소장된 〈미인도〉와 《풍속화첩》이 있는데, 《풍속화첩》에 수록된 주요작품으로 〈단오도 端午圖〉·〈연당(蓮塘)의 여인(女人)〉·〈무무도 巫舞圖〉·〈산궁수진 山窮水盡〉·〈선유도 船遊圖〉 등이 있다.







최우석(崔禹錫) 
 
1899∼1965. 
한국화가. 호는 정재(鼎齋). 서울태생.
1915년에 서화미술회강습소 화과(畵科)에 입학하여 안중식(安中植)과 조석진(趙錫晋) 밑에서 전통화법을 폭넓게 수업하고 1918년에 졸업하였다. 이상범(李象範)과 노수현(盧壽鉉)이 그때의 동기생이었다.
1921년부터 1926년까지 민족사회 미술가들의 서화협회전람회에 정회원으로 참가하여 전통적인 필치의 수묵담채 혹은 사실적인 채색화로서의 화조화·영모화·어해도(魚蟹圖) 등을 출품하였고, 1929년에는 15명의 협회운영 간사진에 선출되기도 하였다.
조선미술전람회(약칭 鮮展)에는 1924년부터 참가하여 1934년까지 근대적인 채색화수법의 현실적 풍경화와 한국의 역사인물상 연작으로서 〈포은공 圃隱公〉·〈이충무공 李忠武公〉·〈고운선생 孤雲先生〉·〈을지문덕 乙支文德〉등을 출품하여 입선과 특선을 거듭하였다. 뒤의 역사인물상들은 일제강점기에 나라를 잃었던 현실상황에 비추어 한 화가로서의 주목할 만한 민족의식의 표명이었다.
그러나 현실적 시각의 자연풍경이나 인물 주제의 작품들은 일본화적인 채색화라는 비판도 받다가 그뒤로는 전통적 수묵담채화의 관념적 작품으로 회귀하여 산수화와 신선도 등을 주로 그림으로써 독자적 창작성을 부각시키지는 못하였다.
1940년에는 서울의 민족사회 화랑이던 조선미술관이 오세창(吳世昌) 등의 자문을 받아 조직한 전통화단의 ‘10명가산수풍경화전람회’에 초대되어 〈일하도해 一蝦渡海〉를 출품하는 등 주목된 작품활동을 보였다.
광복 후에는 1961년까지 대한민국미술전람회(약칭 國展)의 추천작가·초대작가·심사위원을 역임하며 역사인물화·도석화(道釋畵)·화조화·어해도 등을 단속적으로 출품하여 명성을 유지하였다.
현존하는 대표작으로는 국립현대미술관 소장의 〈전가풍미 田家風味〉(1959, 국전출품작)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