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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 새로운 한 주가 시작되었지만 출근하는 발걸음은 무거웠다. 바보 같은 나는 바보 같은 얼굴로 회사에 출근했다. 언제까지 다니게 될지는 몰랐지만 그만두기 전까지는 이 바보 얼굴을 계속 내보여야만 했다. ……하아. “나카하라 씨!” “나카하라 씨, 괜찮아?”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소리치듯 내 이름을 불렀다. 상황을 파악할 수가 없어서 어색하게 웃으며 가벼운 목례로 대응했다. “나카하라 씨만 그런 게 아니야!” 뭐가? “나도 괴로워.” 바로 옆에서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나도! 동경했는데.” “여자한테 흥미가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아아, 아이스 프린스 이야기였구나.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래서 주제도 모르고 우쭐해했었지. “리얼 탐이라고 생각했는데.” 귀에 익숙지 않은 단어가 들렸다. ……리얼 탐이 뭐지? “리얼 탐?” 내 옆에 서 있던 사람이 나 대신 물어봤다. “몰라? 리얼 탐미. BL.” “뭐어?” “여자한테 흥미가 없는 훈남이라면 그야말로 탐미의 세계, BL밖에 없잖아.” ……글쎄? 과연 그럴까? 여자에게 페니스를 물어달라고 하는 사람인걸. “이건 말도 안 돼! 나와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낼 예정이었는데!” 크리스마스는 바로 한 달 전에 지났으니까 댁의 그 예정은 열한 달 뒤의 일이겠네? 분명히 그 열한 달 뒤에는 여자 친구랑 골인해 있을 거야. “아잉, 사장님이 결혼이라니. 정말 싫다~.” 어쩐지 바보&한심이었던 건 나뿐만이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아주 조금 용기가 생겼다. 그래, 맞아. 그만두기 전까지는 확실하게 일해야 되니까 계속 시무룩해 있을 수는 없어. 안내 데스크에 앉아 출근하는 중역들과 비서들을 기다렸다. 이윽고 엘리베이터에서 땡 소리가 울렸다. 이 층에서 내리는 사람은 중역과 비서실 직원들뿐이었다. 내가 맞이해야 될 사람들이라 얼른 자리에서 일어서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아……. 아이스 프린스. 그 외 다른 중역과 비서들도 함께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모습이 보였다. 몸에 충격이 일면서 머릿속이 하얘졌다. 온몸에서 땀이 배어 나왔다. “안녕하십니까.” 허리를 90도로 꺾으며 인사를 했다. 이대로 머리를 숙이고 있는 동안 지나가기를 바랐다. 하지만……. 머리에 문득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와 동시에 카운터에 무언가를 올려놓는 모습이 보였다. 이건……. 사방 5센티미터 정도의 작은 상자. 상자를 놓은 의미를 모른 채 손에 들고 열어보니 안에 반지가……. 반지? 이거, 다이아? “……저어?” 얼굴을 들자 아이스 프린스와 눈이 마주쳤지만, 이번엔 그가 90도로 허리를 굽히고 머리를 숙였다. “앗! 사장님!!” “미안해. 나를 용서해줘.” “네? 용서?” 시야에 그 사람뿐만 아니라 멀리서 이쪽을 쳐다보고 있는 중역들과 비서들이 들어왔다. 엄청난 주목을 받고 있는데요……. “금요일에 했던 전화로 무슨 일이 있었나 생각해봤어. 하나밖에 짚이는 게 없더군. 내가 너무 소극적이어서 너에게 상처를 주었다는 것을 다시금 자각했어. 누군가에게 내가 부모님의 소개로 맞선을 보았단 이야기를 들은 거지? 그래서 내 진심을 보여주기 위해 이것을 준비했어.” “진심? 저어, 무슨 뜻인지 전혀…….” 아이스 프린스는 머리를 들고 무서울 만큼 진지한 눈빛을 내게 보냈다. 아니, 진짜로 무서운데요……. “처음부터 순서대로 설명할 테니까 끝까지 들어줘.” “……네.” “아버지는 병으로 쓰러진 뒤부터 급격히 마음이 약해지셨어. 그래서 빨리 손자의 얼굴이 보고 싶다며 내게 결혼하라고 압박하셨지. 맞선 상대는 거래처 사장의 딸이야. 하지만 난 계속 사랑하던 사람이 있어서 거절하려 했어. 사랑한다고 해봤자 짝사랑이야. 난 누구와도 약혼하지 않았고, 사귀고 있는 여자도 없어.” ……정말로?“알고 있겠지만, 확실히 난 일류 대학을 나왔어. 공인회계사 자격도 재학 중에 땄지. 하지만 그건 결과론이야. 정말 똑똑한 녀석들은 별달리 공부도 안 했는데 척척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자격증도 따. 하지만 난 모든 걸 내던지고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되는 수준의 인간이라 어렸을 때부터 필사적으로 공부했어. 수험도 자격시험도 그랬지. 그래서 지금까지 여자와 사귀었던 경험이 없었어.” “네?” “믿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사실이야. 어려워. 어떻게 대하면 좋을지도 모르겠고, 지금은 갑자기 취임하게 된 사장 업무만으로도 벅차서 이성에게 신경 쓸 여유도 없어. 그래서 짝사랑……, 아니, 첫눈에 반해버린 사람에게 어떻게 다가가면 좋을지 알 수가 없었어. 처음부터 계속. 네가 접수 담당으로 파견되어 왔던 날부터.” …………. ………뭐? ………너? 너라니……, 나? “넌 누구에게나 웃는 얼굴로 대하지만, 누구의 유혹에도 넘어가지 않는다고 들었어. 아무리 우수한 사원이라 해도 다 거절한다고……. 난 사장의 자리에 앉아 있으니까 데이트를 신청했다가 거절당하면 입장이 말이 아니게 되겠지만,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했었어. 하지만 차일까 봐 무서워서 차마 나서지도 못하고 그저 바라만 볼 뿐이었지. 그러던 때, 네가 책을 보고 있는 걸 발견해서……. 정말 미안해. 약점을 잡고 어떻게든 너를 회유하려고 했어. 직권을 남용해 비겁한 방법을 쓰고 말았어.” “……아, 저어.” “어제 아버지를 설득하고 상대방에게도 사죄해서 혼담은 정식으로 거절하고 왔어. 제발 내게 기회를 줘. 이번엔 비열한 짓은 하지 않을게. 성심성의껏 너에게 최선을 다할 테니까……. 네 꿈에도 최대한 협력할 테니까, 그러니까 나와 사귀어줘. 결혼을 전제로.” 으──. 엑──. 깊이 머리를 숙인 그의 모습을 망연자실하게 쳐다보며 굳어 있었다. 그때 주위에서 짝짝 박수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더니, 순식간에 화악 퍼져서 어쩐지 성대한 박수의 소용돌이가 되어 있었다. 어엇? 잠깐만. 난 아직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는데? “사장님, 잘 하셨어요!” “그래, 남자다웠어.” “이런데도 오케이하지 않으면 여자가 아니지!” 어? 뭐? 나? 눈을 크게 뜨고 주위를 둘러보니, 모두들 아이스 프린스의 편을 들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래? 그런 거야? 이런 일은 여자가 우선인 거 아니었어? 으에에에엑──! “나카하라 씨, 대답은?!” 아니, 그렇게 연극 무대에서처럼 환호성을 질러도 말이지. 하지만, 하지만, 눈앞엔 진지한 눈빛의 아이스 프린스……. “그게, 아……. 저어, 저는…….” 거기까지 말했는데, 갑자기 눈물이 글썽이더니 넘치고 흘러내려서……. “사장님이 좋아요. 저어, 기뻐요.” 라고 입이 멋대로 대답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