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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 사흘째는 무슨 일을 시킬까 생각하며 출근했는데, 비서에게 아이스 프린스는 1박 2일로 출장이 잡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어째서인지 조금 허탈해졌다. 아무 일 없이 평화롭게 하루가 지나갔다. 왠지……, 뭐라고 말하면 좋을지 모를 감정에 머릿속이 복잡했다. 안도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아쉬워하는 것 같기도 했다. 만약 이대로 아이스 프린스와의 관계를 지속해 나가면 왠지, 그러니까 좋은 관계가 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아이스 프린스가 여성 관계에서 트러블이 있다는 소문은 들은 적이 없었다. 아무리 미인이 접근해도 쳐다보지도 않는다던데. 그런 사람이 사내에서 그런 야한 짓을 하기를 바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게다가 내 실수 때문에 ‘펫 계약’인지 뭔지를 맺었지만, 맛있는 저녁까지 대접해주고, 차로 집까지 태워다 주고, 대단히 신사적이잖아? 게다가 나에게 대단히 유익한 정보를 얻어냈다! 평소 아이스 프린스는 고용한 운전수가 운전하는 회사 차로 통근한다고 했다. 그런데 이번 일주일 동안은 필요하지 않다고 했다고 한다. 그 이유는 나를 집까지 바래다주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그렇게 생각했더니 모욕적인 행위가 아니라, 내가 마음에 들어서 그러는 것인가 싶어서……, 어쩐지 굉장히 기쁜 감정이 솟아올랐다. 나흘째도 아이스 프린스는 출장 때문에 자리에 없었다. 오늘 밤에 돌아온다고 했다. 오늘은 금요일이었으므로, 주말에 만나지 못하면 실질적으로는 다음 주 월요일에 ‘펫 계약’이 끝나게 됐다. 앞으로 하루……겠지? 주말에 대해서는 들었던 바가 없었으니까. 아니면 토요일이나 일요일에 불러내려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점심시간이 되었다. 비서들과 함께 사원식당으로 향했다. “오늘의 정식, 커틀릿이랑 연어 뫼니에래. 어떤 메뉴로 할까?” “난 정식 말고 짬뽕으로 할래.” “나카하라 씨는” “저는 우동이요.” 그 순간, 우와──, 하는 탄성이 울렸다. “나카하라 씨는 우동을 진짜 좋아하는구나! 일주일에 반은 우동 아냐?” “하하, 그랬나? 하지만 오늘은 우동이 먹고 싶은걸요.” 그렇게 말하고 얼른 그 자리를 떠나 소바 우동 코너로 갔다. 확실히 우동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선택한 이유는 ‘좋아하니까’가 아니었다. 단순히 저렴했기 때문이었다. 사원식당에선 보통 시세보다 훨씬 저렴하게 점심을 먹을 수 있었다. 그중에서 제일 저가인 메뉴가 ‘소바 우동’이었다. 300엔이면 먹을 수 있으니까. 게다가 곱빼기로 주문하더라도 가격이 같았다. 이것밖에 없어. 사치는 안 돼. 창업해서 가게를 열 테니까. 순간, 아이스 프린스의 ‘융자’라는 말이 뇌리를 스쳤지만, 그것에 기댈 생각은 없었다. 그건 안 돼, 너무 위험해. 아니, 내가 평생 펫이 되어야 할 것 같아. 그렇기는 했지만, 아이스 프린스가 그런 부끄러운 짓을 요구하는 것을 보면 내가 특별한 존재일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내가 마음에 드니까 그러는 것일까? 하고. 만약 그렇다면 평생 펫이 되어도 괜찮을지 몰라……. 하지만 나처럼 평범한 여자를 대기업 사장에 키도 크고, 얼굴도 잘생기고, 머리도 좋은 사람이 마음에 들어 할 리가 없었다. 이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근무시간에 딴 짓을 한 바보 같은 여자를 이용하고 있는 것밖에 안 돼. 그렇다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뭐랄까……. 으음──. 다른 여자들은 상대도 해주지를 않아서 그에게 접근할 수조차 없다는데, 나만은 이렇게……, 키스하고 몸을 만지고……. 아니, 아니, 아니, 잠깐, 잠깐, 잠깐. 사귀지도 않는 남자가 나를 원한다는 것은, 단순히 육체만의 관계……. ……역시 그런 거지? 뭘 혼자 우쭐해하는 거야? 하아……. 한숨만 나왔다. 하지만. 그래. 하지만. 그의 성벽이 괴상하지만 않다면, 내가 조금이나마 마음에 드니까 그러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잖아. 그렇지 않으면 그야말로 변태 아냐? 리카, 자기 자신에게 좀 더 자신감을 가져! 어렸을 때에는 마이너이지만 키즈 모델도 했었잖아! “확실하지는 않지만, 사장님이 약혼할 것 같은 분위기야.” ─뭐? “진짜? 여자한테 흥미 없는 것 아니었어?” “하지만 요전에 전화로 자기 인생은 자기가 결정하겠다. 일은 어쩔 수 없이 뜻을 굽혔지만 결혼 상대는 스스로 정할 거라고 얘기하는 걸 들었어. 전화 상대는 아마도 고문이신 아버님이었을 거야.” “하지만 그 말은 거절한다는 뜻이잖아? 왜 약혼할 것 같다고 생각했어?” “거절하기 힘들면 사장님이 직접 상대가 있다고 말하겠다고 했거든.” “그럼 사장님, 사귀는 사람이 있는 거구나?” “그렇지 않을까?” ………. ………. ………. 그렇……구나. 그렇겠지? 그렇게 무엇이든 다 갖춘 사람에게 특정한 사람이 없다는 것이 더 이상해. 그야 그렇지. 그렇구나. 아이스 프린스에게는 여자 친구가 있었구나. 그럼 나와 맺은 ‘펫 계약’은 정말로 펫이나 장난감 삼아 놀고 싶어서, 그래서 꺼낸 말이었구나. ……나는 왜 이렇게 바보 같을까? 그렇게 부끄러운 짓을 강요당했는데 화를 내기는커녕 나를 마음에 들어 한다고 멋대로 착각해서 들뜨기나 하다니. “나카하라 씨? 왜 그래?” “저기, 괜찮아?” 비서들이 염려하는 소리가 들리기는 했지만 반응할 수가 없었다. 나는……, 이 바보 같은 나는, 혼잡한 점심시간에 사원식당에서 어린애처럼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사람들의 주목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동시에 비서들에게 아이스 프린스가 약혼할 것 같다는 얘기를 듣고 울기 시작했으니, 그가 좋아서 실연당했기 때문에 운다는 걸 들켜버린, 어떻게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난 정말 바보야……. *  *  * 그런 바보 같은 내게 전화가 걸려온 건 밤 10시경. 목욕을 하고 이 최악의 하루를 빨리 끝내버리려 하고 있을 때였다. “사장님…….” “주인님이라고 몇 번을 말해야 되지?” “…….” “리카?” 도저히 반응할 수가 없었다. 뭐라고 대답하면 좋을까? 내가 너무 바보 같았다. 이젠 됐어, 이런 바보 같은 짓……. “내일 외출할 거니까 시간을 비워둬.” 내일? 내일은 토요일……. “리카, 듣고 있어?” “듣고 있어요. 하지만 이젠 싫어요.” “뭐……?” “계약은 파기하겠어요. 저의 근무 태만을 파견 회사에 말씀하세요. 손해배상이 얼마나 나올지는 모르지만 지불할 테니까……. 반드시 지불하겠어요. 그러니까…….” 밀려드는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눈물이 흘러넘쳤다. 목소리가 엉망진창으로 뒤집어졌고, 숨은 꺽꺽댔고, 코는 훌쩍거렸고……. 호흡을 제대로 할 수가 없어서 숨이 막혔다. “갑자기 왜 그래?” 왜 그러고 뭐고……,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약혼할지도 모르는 상대가 있다면서요?” “뭐?” “정해진 사람이 있는 분과 더 이상 그런 음란한 짓은 할 수 없어요. 상대방에게 미안하지도 않으세요? 아니, 그런 것과 상관없이 처음부터 해선 안 되는 일이었어요. 너무 비참해요. 고소하고 싶으면 하세요. 전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그만두겠습니다. 이런 건 더 이상 견딜 수 없어요. 게다가 딴짓이나 하는 파견 사원은 필요 없다고 하셨죠? 임기 만료까지 근무할지 말지는 사장님이 파견 회사와 의논하시고 결정해주세요.” “리카, 잠깐 기다려.” “실례하겠습니다.” 그대로 전화를 끊었다. 곧바로 다시 전화가 울렸지만 전원을 꺼버렸다. 괴로움이 가슴을 점령했다. 비참하고 한심하고──. 난 경계했다시피 아이스 프린스에게 마음을 빼앗겼던 셈이야. 이미 예전부터. 아이스 프린스……, 아니, 유키타카 사장님이 좋아──.